[리뷰]당신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입니까
2008. 01. 25 삶/여가/책 |
악으로 깡으로 사회적 편견을 무너뜨린 ‘아줌마 파워’
스포츠 경기와 여자의 삶은 각본없는 드라마와 같이 극적이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티저 포스터 스틸 컷 ? MK픽쳐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오래 전 봤던 영화 <튜브>에서 배두나의 대사가 떠오른다, ‘행복한 기억 하나면 사는 데 이유는 충분하다’고. 시인 안도현은 연탄재라는 시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핸드볼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감독 임순례, 제작 MK픽쳐스)은 삶의 고단함 속에 빠져들지 않고 이를 극복하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든 세 명의 아줌마 핸드볼 선수들을 중심으로 비인기 구기종목의 선수들이 겪는 분투기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시간 때우듯 살아온 관객들에게 감동이 깃든 깊고 잔잔한 울림을 준다.
1996년 <세 친구>,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이어 오랜만에 장편 영화를 내놓은 임순례 감독의 영화 속에는 유난히 소외된 아웃사이더 캐릭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임 감독이 앞선 영화에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소외된 남자들의 이야기를 한 것과 달리 이번엔 육아, 나약, 사회적 편견 등에 시달리는 한국의 보편적인 여성들을 비인기 구기종목인 ‘핸드볼’. 게다가 국내에서 흥행에 번번히 실패한 스포츠 경기를 소재로 2008년 새해 당찬 도전을 한 것은 흥행과 담을 쌓았다고도 생각했을 수 있는 ‘도전 중의 도전’ 아니, 차라리 도박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영화의 제목처럼 사람이 살아가면서 우연치않게 그리고 갑작스레 닥치는 역경과 좌절 속에서 삶을 온전히 지탱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건 ‘생애 최고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고 ‘과연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 하는 자문을 하게 만든다.
프로야구, 프로축구 등 유난히 구기 종목에 열광하는 우리나라에서 구기 종목인데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핸드볼’. 영화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소외된 국가대표 여자 핸드볼 선수들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세 차례의 동점을 이루는 극적인 파노라마를 배경으로 임 감독은 주류 사회의 아웃사이더인 세 명의 기혼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미숙(문소리 분)은 화려한 국가대표 시절 선수끼리(?) 결혼 생활도 잠시, 도박으로 빚지고 집 주위를 떠도는 무능한 남편 대신에 아들을 키우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아줌마 가장이다.
사채업자가 들이 닥쳐 세간살이를 부수질 않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최고의 대표선수이지만 비인기 종목의 설움으로 팀이 해체되질 않나, 맡겨놓을 곳 없는 아이를 경기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대형 마트에서 어색한 호객행위로 생계 걱정도 해야 하는 워킹맘이기도 하고.
역시 올림픽 금메달 2연패의 주인공이면서 일본 핸드볼 프로팀의 여감독으로 있던 혜경(김정은 분)은 핸드볼 올림픽 대표팀 감독대행으로 왔지만 일본에 딸을 둔 이혼녀인 동시에 남성 중심의 협회와 갈등을 일으키며 신진과 구세대 선수들간의 화합을 이끌지 못하자 여 감독은 시기상조라는 사회적인 편견으로 인해 물러나고 만다.
또 다른 아줌마 정란(김지영 분)은 올림픽 대표팀 선수로서 기량이 훌륭하지만 제 실력이 빛도 보기 전에 소속팀 해체를 겪는 뽀글 파마머리의 만화스럽고 전형적인 아줌마 캐릭터이다.
헌신적인 남편(성지루 분)과 함께 고깃집을 운영하면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이에 괄괄한 성격의 그녀는 선수 시절, 호르몬제로 생리를 조절하려다 불임에 시달리고 있으며, 똑 같은 일을 겪는 어린 후배들의 아픔을 따스하게 보듬기도 한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감동을 이끄는 아줌마 선수 3인방..문소리, 김정은, 김지영 (사진 왼쪽부터) ? MK픽쳐스
이들과 조금은 다르지만 매번 외모로 인해 맞선에 실패하는 올드미스 수희(조은지 분)는 영화에서 마지막 맞선남(하정우 분)에서 실패하고, 현자는 올림픽 대비 훈련 중 정란과 같은 일을 겪고 보람은 가장 유망한 청소년대표 출신이지만 팀 부적응과 부상 등에 시달리는 등 극중 캐릭터들은 모두 온전하지 못하지만 이들이 갈등과 좌절 속에서 희망을 품고 화합을 이끌어내며 영광을 재현해내는 데 카메라는 집중한다.
영화는 대표선수 출신의 승필(엄태웅 분)의 감독 부임으로 인해 선수촌 이탈, 팀워크 와해와 불협화음 등으로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여자 선수끼리의 단합된 모습을 점차 주목하면서 냉소적이고 독단적인 승필마저 이들에 동화시킨다. 승필과 혜경의 불암산 경주는 세대교체 실패와 덴마크 등 북유럽 핸드볼 강국에 대한 극약처방으로 ‘아줌마 대표선수 3인방’의 컴백 카드를 내세운다.
이들의 활약으로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까지 승승장구를 이끌어가던 한국 여자핸드볼 팀은 결승전을 앞두고 미숙의 무능한 남편이 자살 기도했다는 소식으로 인해 일대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고진감래라고 하였던가..코리안 아줌마 파워는 전 세계를 경악시키며 덴마크와 결승전에서 정규 경기 이후 연거푸 동점을 기록하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스포츠 경기에서 맛보는 특유의 통쾌함과 스릴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카메라는 헐리우드 스포츠 영화처럼 해피엔딩과 흑백의 논리로 마무리짓지도 않고 볼거리 위주의 스펙터클한 경기 장면을 담기보다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에 역점을 둔다.
모 CF의 카피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는 질문에 최근 경기침체와 고유가 등으로 인한 경제 불안을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한국인 특유의 헝그리정신을 역설하고 생존을 위해 머뭇거리지 않는 ‘아줌마 파워’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려 한 듯 보인다.
결국, 인디영화 감독으로 정평이 난 임순례 감독이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200만여 명이 넘는 전국 관객을 동원하는 등 새해 초 한국영화계에 ‘다크호스’로 나서 마이너 장르와 소재로부터 자신의 첫 상업영화로 성공과 함께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계기를 만들고 ‘감독으로서 최고의 순간’을 맞이한 것은 국내 영화산업계에도 반가운 소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