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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의 선택 “고인 지식은 썩는다”

  이희욱 2008. 02. 14 뉴스와 분석, 디지털라이프, 삶/여가/책 |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이나 지식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길 원한다. 웹은 지식 컨텐트 유통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일단 웹에 공개된 지식은 순식간에 네트워크를 타고 들불처럼 퍼진다. 어떤 학자는 돈을 받고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선택의 문제다.

대학에서 양산하는 많은 논문들은 지금까지 독점 계약을 맺은 학술저널의 극소수 독자들을 대상으로 소비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저널의 제한된 공간에 입주하지 못한 대다수의 논문은 서고에서 잠자거나 소리 없이 잊혀지곤 했다.

온라인 네트워크의 발달은 이런 지식 유통의 흐름마저 바꾸고 있다. 극소수에게만 유통되던, 혹은 묻혀 있던 지식 컨텐트를 자유롭게 공유하자는 ‘오픈 액세스’ 운동이 발화점이다.

논문·강의 온라인 공개하는 ‘오픈 액세스’ 운동 확산

Harvard Univ. Logo

지난 2월12일 미국 하버드대학에선 예정에 없던 투표가 실시됐다. 학교는 결정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학부생들에게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학부 논문을 지금처럼 돈을 받고 판매할 것인가, 무료로 공개할 것인가.’

인문 및 과학 학부생들만 참여한 제한된 투표였지만, 결과는 의미심장했다. 학생들은 ‘공개’를 선택했다. ‘논문은 제한된 저널 독자들을 위한 상품이 아니라, 이를 필요로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공공재’란 것이 학생들의 생각이었다.

하버드가 택한 공개 방식은 이른바 ‘옵트아웃’이다. 저작권자가 특별히 요청하지 않는 한, 논문은 인터넷에 자유롭게 공개된다. 물론 저작자들은 여전히 저작권을 갖고 논문을 자유롭게 저널에 게재하거나 유료로 판매할 수 있다.

오픈 액세스는 지식정보 소비자와 학자들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다. 학술정보를 자유롭게 개방·공유하면 가치 있는 글이 먼지에 쌓여 잊혀질 위험이 줄어든다. 지식은 나누고 토론하면서 발전한다. 학자들은 열린 광장에서 지식을 검증받고 학문적 명성을 쌓을 수 있다.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에겐 이 광장이 곧 오아시스다.

“우리 대학 소장고를 개방하는 일은 상업 출판인들로부터 학문을 자유롭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하버드대학 도서관장인 로버트 단턴의 이 선언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외국 대학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열린 강의’도 학문을 자유롭게 개방한다는 점에서 오픈 액세스와 비슷하다.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는 2001년부터 오픈코스웨어(OpenCourseWare) 계획을 공개하고 주요 강의들을 CCL을 적용해 온라인에 무료로 개방했다. 예일대도 지난해 12월부터 주요 강의 내용을 오디오와 비디오, PDF 파일로 온라인에서 내려받을 수 있는 ‘오픈 예일 코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버클리대학도 학기별 강의내용을 팟캐스팅 형태로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다.

허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겐 학술정보의 자유로운 공개와 유통이 위기의 징후다. 출판업계는 이런 방식의 지식 공개 운동이 결국엔 논문의 권위와 질을 떨어뜨리고 수익모델을 파괴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소규모 전문 저널들은 쓰러지고 거대 출판 자본만 살아남아 출판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잖다.

반대로, 오픈 액세스 운동 지지자들은 지금의 출판 시스템이 또다른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값비싼 저널은 도서관의 책 구매 예산을 삭감시키게 되고, 결국은 출판업자들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출판업계 불황의 여파는 논문을 계속 출판해야 할 학자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국내 대학은 되레 논문 유료화?

우리나라 사정은 딴판이다. 국내 일부 대학들은 심지어 개방에 역행하는 움직임마저 보인다. 지난해 말부터 주요 대학 도서관이 소장 논문들을 저작권 대행업자를 통해 유료화하려는 움직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이대로라면 대학에서 배출되는 논문들도 돈을 내고 이용해야 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원저작자인 교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대행업자의 상술과 대학의 방관 속에서 진행된다는 데 있다.

국내 대학에서 쏟아지는 많은 논문들은 대부분 대학 도서관 서고에서 낮잠자고 있다. 제목과 목차, 요약문 정도가 온라인에 공개되기는 하지만, 정작 본문 내용을 확인하려면 도서관을 직접 찾든지 돈을 주고 사서 읽어야 한다. 까다롭고 번거로운 승인 절차도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대학 논문이 지식공유의 넓은 바다로 나가기엔 저작권의 둑이 너무 높고 견고하다.

학자나 교수가 자기 논문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건 정당한 일이다. 노력과 연구의 산물을 제 가치에 맞게 유통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허나 굳이 제한된 공간에 지식의 산물을 가둬두려 하지 않는 학자라면 지식개방 운동에 동참하는 편이 낫다. 돈 몇 푼으로 따질 수 없는 학문적 명성과 칭송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니까.  

대학이나 출판업계도 새로운 지식소비 흐름을 마냥 외면하고만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소리바다 사태’를 되돌아보라. 새로운 흐름에 맞는 변화는 외면한 채 ‘서비스 폐쇄’만 외쳐댄 음반업체들의 모습을 되풀이할 것인가. 하버드의 실험은 그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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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esponses to “하버드의 선택 “고인 지식은 썩는다””

  1. 공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국내에서는 해당 사안에 갑과 을이 있을 경우가 많고, 견제를 할 수 있는 제3의 그룹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각적이고 다양한 소통을 하게 되면 해결방안이 생기기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주요 언론매체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상황에서는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2. ON20편집국

    안녕하세요 ON20편집국입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이글 한번 매거진ON ‘세계’섹션에 보내보시면 어떨까요? 이번에 추천되시면 25일 새내기특별판으로 발행되어 서울지역 대학교에 배포됩니다. 많은 관심부탁드립니다.^^

  3. ON20편집국

    안녕하세요.

    ON20편집기자입니다.

    asadal님이 on20 매거진란에 등록하신 글이 발행될 가능성이 높아서

    asadal님의 소개와 소개이미지(본인의 사진 혹은 형상화할 이미지)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abymv@on20.net 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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